공감가는 포스트를 봤다.

글쓴분은 "우리나라 사람은 생산에 익숙치 않다"라는 제목이 선정적인건 아닌가 하는 약간의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지만
딱 그정도의 제목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대학때 배우던 학문도 모조리 외국에서 연구한 결과였고
교수님들도 주로 절대다수가 미국, 몇몇분이 유럽에서 학위를 따 오신 분들이었고
그리고 우리 학교에서 학위받은 교수님이 몇몇분 계셨을 뿐.
교과서는 당연히 원서

그때 교수님들 중에도
"우리나라는 학문의 수입국이다"며 안타까워하시는 분들이 계셨던 것 같다.
대학이 전달자보다는 새로운 학문과 사상, 지식의 창조자가 되어야하는데 그와 거리가 먼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내가 공부했던 수학이나 컴퓨터공학은 그나마 국가나 지역적 특성과 거리가 먼 학문이라 그래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는데
사회학이나 경영학, 정치학 같은 경우라면 어땠을까?
그쪽 친구들 교과서도 보니 거의 원서였던 것 같은데
글로벌한 관점도 좋지만 우선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에 발붙인 이론이 아닌 미국이나 유럽 발상의 이론을 공부하면서 괴리감이 느껴지지는 않았을까?


지금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때때로 그런 벽을 느낄 때가 있다. 

특히 고객 설득이 필요할 때
아무리 이성적이고 적합한 아이디어나 의사결정이라고 확신이 들더라도
"그거 해외 사례 있어요?"라는 한 마디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모 회사가 작성한 컨설팅 보고서에 어느 프로젝트고 할 것 없이 보고서의 절반 정도가 해외 사례 소개로 도배되어있던 걸 보고 씁쓸했던 적이 있다. 직접 그 내부를 뜯어본 깊이 있는 사례인 경우는 매우 가치있는 레퍼런스겠지만
그렇지 않고 두세장짜리 언론 보도자료 같은걸 요약해서 레퍼런스라고 써둔것도 꽤 있었으니...


물론 고객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도보다 안정되고 검증된 길을 찾아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니
(고객 담당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해야 혹시 실패하더라도 면피할 명분이 있다.
이러이러한 사례가 있어서 시도했던 거다, 무모한 시도는 아니었다, 근데 상황상 어쩔 수 없이 실패했다 라는.
물론 이렇게 실패했다 하더라도 대외적으로는 절대 "실패"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우리나라 프로젝트중에 "실패"로 결론내린 프로젝트가 얼마나 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해외 사례라던가 선진사 어디라던가 이 분야의 권위자 누구누구의 말이 무게를 갖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아쉬운 것은
그 "해외 사례"와 "권위있는 누군가"를 숭상하는 문화 뒷편에
정작 그 해외 사례가 갖는 본질적 가치를 내재화하기보다는 겉보기 효과를 노리는 경우도 많다는 것.

그래서 외국의 신기술이라던가 문화나 사상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약간 그 성격이 변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은 아닌지.

예전에 web 2.0에 대한 이슈가 한창일때
어느 신문에 "우리나라는 이미 web 2.0을 넘어섰다. web 3.0이라고 봐야 한다"는
코미디같은 기사가 실린걸 보고 웃다못해 짜증이 났던 기억이 난다.

이 기자는 web 3.0이 뭔지나 알고 기사를 쓴 것인가?
우리나라에 web 2.0 서비스라고 부를 만한 것이 얼마나 살아남았는지
그리고 우리나라 인구 대다수가 쓰는 서비스 중에 web 2.0의 패러다임을 제대로 반영한 서비스가 얼마나 있는지 분석해보고 쓴 것일까?

IT강국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늘 무언가의 수입국이었던 우리나라가 인터넷 분야에서만큼은 앞서간다고 자축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다.


권위자의 말과 해외 사례에 휘둘리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따지고 들면 어떤 아이디어나 제안, 의사결정 포인트를 스스로 판단할 자신이 없어서가 아닌가 싶다.
합리적이고 적절한 해결책인지를 판단하는 능력, 스스로의 판단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웹 진화론 2"에서 공감갔던 부분 중에 하나가
미국 젊은이들은 실력은 보통이어도 자신감이 넘치는데,
일본 젊은이들은 실력이 있는 경우에도 자신감이 너무 없다.
라는 부분이었다.
일본의 상황이지만 우리나라에도 들어맞지 않나 싶다.

일본의 교육제도나 서구 (특히 미국)에 대한 정신적 부채감과 일그러진 사대주의 같은 면들은
우리나라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처럼 권위있는 누군가가 제시한 길을 그대로 걷고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시도를 기피하는 문화가 지배적인 지금 구도에서는
대학생들이 고시에 매달리고
벤처 창업은 아예 생각도 않고
큰 조직에 소속되어 그 조직의 힘의 일부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다.

그런 조류를 탓하기 전에 이런 근본적인 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교육에서건 연구에서건 일에 있어서건
"창조성"이라는 말이 그저 구호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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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만 2009.02.19 00:56

    뭐랄까요. 레퍼런스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클라이언트의 압박을 느끼는 신생 벤처...
    기업 구성원의 학력 그동안의 프로젝트 수행 결과 등을 나열해도 '그래서 너희들 모여서 뭐했는데?'라고 물어보는 클라이언트, 또는 제휴사... 그들은 처음부터 뭔가를 해놓은 것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뭐든 새로 하기에는 힘들지만 더 힘든 것은 새로 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옆에서 혀를 끌끌 차는 고참 어른들의 냉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에 도대체가 격려나 칭찬이란 것이 없네요. ㅠ,.ㅠ

    •  댓글주소  수정/삭제 elliecn 2009.02.19 01:02 신고

      그렇죠~

      저도 일의 특성상 어떨 때는 제가 고객을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다른 회사의 제안을 받아서 판단을 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한데 쉬운 문제가 아니더군요.

      저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좋은 아이디어이고 좋은 기술력을 가진 업체라고 생각해도 윗분들이 "뭐 문제 생기면 니가 책임질거냐"라고 하면 허걱... 아니겠습니까 T-T

      정말 힘든것은 고참 어른들의 냉소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우리는 그런 냉소하는 어른이 되지 말자 (지금도 이미 어른이지만 ㅋㅋㅋ)고 다짐하는 수 밖에요 ^^